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토모 소린 (문단 편집) == 생애 == 아버지 요시아키가 장남인 소린을 폐적하고 대신 소린의 배다른 동생인 시오이치마루(塩市丸)에게 당주 자리를 넘겨주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챈 소린파 가신들이 요시아키를 야습한다(二階崩れの変, [[니카이쿠즈레의 변]]). 이 사건으로 요시아키의 두 딸과 시오이치마루, 시오이치마루의 생모가 모두 사망하고, 요시아키 본인도 이 때 입은 상처로 인하여 며칠 후 사망하면서 소린이 당주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반 소린파 가신들은 모조리 [[숙청]]되고 만다. 바다 건너 [[주고쿠]]에서 [[오우치 요시타카]]가 [[스에 하루카타]]의 모반으로 죽자 자신의 동생인 [[오토모 요시히데]]([[오우치 요시나가]])를 [[오우치]] 가 당주로 보내고 오우치 가의 영토인 [[부젠]]과 [[지쿠젠]]에서 오토모 가의 영향력을 넓혀 갔다. 또한 히젠 슈고직을 획득하고 히고에서 자립한 숙부 키쿠치 요시타케를 멸망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세력 확대에 힘썼다. 본래 히젠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쇼니씨|쇼니 가문]]은 오우치 가문이라는 공통의 적 때문에 오랫동안 오토모 가문의 동맹이었으나, 외교적인 상황 호전으로 인해 아예 히젠 자체를 얻기를 원한 오토모 소린은 [[류조지 다카노부]]를 밀어줘서 쇼니 후유히사를 죽이고 쇼니 가문을 멸망시키도록 해줬다. 한편으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 서양에서 온 바테렌([[선교사]])들이 [[가톨릭]]을 선교하는 것을 허락했고 이 것에 불만을 품은 가신 이치마다 아키스케, 오바라 아키모토 등이 반란을 일으켜 치세 초기는 상당히 힘들었다. 히젠에서도 소린의 휘하로 들어왔던 [[류조지 다카노부]]가 세력 확장을 하면서 오토모 가문의 영향력에 의문이 생겨났다. 더욱이 [[모리 모토나리]]가 수백년간 [[주고쿠]]를 지배해 온 명문 오우치 가를 완전히 멸망시키면서 그 대가로 소린은 부젠과 치쿠젠을 영토로 얻긴 했지만, [[모리 타카모토]]의 공작을 통해 이 지역의 호족들이 자주 모리 가문에 귀의해서 골머리를 썩었다. 모토나리가 요시나가를 죽이는 것을 묵인하는 대가로 모토나리와 손잡고 거병한 치쿠젠의 아키즈키 후미타네(秋月文種) 토벌을 인정받아 아키즈키 가를 멸했지만, 아키즈키 다네자네(秋月種実) 등 아키즈키 후미타네의 아들들이 모토나리에게 도망갔고 모토나리는 이들을 받아들여 아키즈키 가문이 부활해서 부젠까지 확장할 수 있게 도와줬다. 치쿠젠에 전진기지 만들어놓으라고 보내놓은 후다이 가신인 타카하시 아키타네(高橋鑑種)[* 원래 이름은 이치마다 치카무네(一萬田親宗)로 오토모 가문의 먼 방계 출신이다. 후사가 단절될 위기에 놓인 치쿠고 타카하시 가문에 양자로 들어가서, 치쿠젠에 훗날 오토모 가문의 주요 거점이 되는 이와야 성을 쌓고 본거지로 삼았다.]마저 모리씨와 내통해, 이 지역에서 오토모 가는 모리 가와 격렬한 전투를 지속해야 했다. [[1559년]]에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막대한 헌금을 하여 부젠, 치쿠젠 슈고와 규슈 탄다이(九州探題)에 임명되었으며, 1567년 모리 가와 내통하던 가신 다카하시 아키타네를 [[다치바나 도세츠]]의 도움으로 멸망시킨다. 이렇게 모리 가와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1569년]]에는 서쪽의 [[류조지 다카노부]]와도 대립해, 히젠을 침공하나 동쪽에서 모리 모토나리가 치쿠젠으로 빈집털이를 오는 바람에 퇴각한다. 이에 오우치 씨 일족인 오우치 테루히로를 스오로 보내 모토나리를 괴롭혀 아키로 물러나게 한다. 이로 인해 모지 성(오늘날의 [[기타큐슈시]])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부젠 국 대부분은 오토모 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한편 자신이 버렸던 쇼니 후유히사의 동생 마사오키와 쇼니 가문의 잔당을 후원해 다카노부와 싸우게 한다. [[1570년]] 다시 다카노부와 히젠에서 전투를 벌이지만 이마야마 전투에서 기습으로 동생이자 총대장 치카사다가 전사하고 만다. 결국 형식적인 우위만 확인한 채 류조지 가와 화친을 맺고 [[1576년]] 아들 요시무네에게 당주 자리를 양도하고 은거한다. 1577년 [[시마즈 요시히로]]가 휴가를 침공하고 휴가의 다이묘 이토 요시스케가 오토모에 망명한다. 오토모는 시마즈와 결판을 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나섰으나 미미가와 전투에서 또 대패하였으며, 이 전투로 [[다키타 지카카네]]·[[쓰노쿠마 세키소]]·[[가마치 아키모리]] 등 많은 가신들과 수하 호족들이 전사한데다 여러 호족들이 배신하여 오토모 가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오토모가 휘청이는 동안 서쪽 히젠은 [[류조지 다카노부]]가 완전히 독립해 떨어져나갔고, 치쿠고 호족들도 대부분 류조지 다카노부의 수하로 갈아탔다. 거기에다 모리 가와의 적대관계로 인해, 모리 가에 의탁하고 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한때 6국의 슈고직과 규슈 탄다이를 막부에서 임명받은 오토모 소린을 거꾸로 '6국의 흉도'로 지목하면서 전통적인 권위도 위태롭게 된다. 그래도 규슈 서쪽을 장악한 류조지가 시마즈와 적대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규슈는 삼국의 균형이 맞아떨어져 소강 상태를 보였으나, 1584년, 시마즈는 류조지마저 오키타나와테 전투로 굴복시켰다. 오토모는 가신 [[타치바나 도세츠]]를 보내 치쿠고를 침공케 했으나 도중에 도세츠가 병사하면서 오히려 시마즈 군의 공격을 받는다. 일껏 도세츠가 확보한 치쿠고 영지들은 거의 다 시마즈 군에 항복했고, 치쿠젠의 오토모 거점들은 물론 오토모 가의 본거지인 분고까지 시마즈의 공격에 노출되어 오토모 가의 세록 중신들마저 시마즈 군에 항복하기 시작했다. 결국 1586년 오사카로 가서 [[혼슈]]를 대부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시마즈는 도요토미가 본격적으로 규슈에 오기 전에 규슈를 통일해버리려는 심산으로 오토모에 총공격을 가했다.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거성 후나이관을 빼앗겨 우스키 성(臼杵城)에서 농성을 벌인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Oda_Nobunaga_swivel_breech_loading_gun.jpg]] || 우스키 성 전투 당시 시마즈 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활약한 것이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불랑기포]]였다. 자세한 것은 [[불랑기포]] 항목 참조. [[158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가 [[규슈 정벌]]에 나서며 전세가 역전된다. 하지만 소린 자신은 [[시마즈 요시히사]]의 항복 직전 병사하고 만다. 향년 58세. 히데요시는 소린에게 휴가 1국을 주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해, 오토모 가는 분고 1국으로 결정된다. 이후 오토모 가는 조선 침략 때 [[평양성 전투]]에서 당주 [[오토모 요시무네]]가 [[고니시 유키나가]][* 오토모 소린과 마찬가지로 [[기리시탄]] 다이묘였다.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를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가이에키]]당한다. 미미가와 합전 직전 선교사 [[프란시스코 카브랄]]로부터 세례를 받아 세례명을 '''돈 프란시스코'''(라 하였으며 프란이라고 서명하였다. 사망했을 때 키리시탄식으로 장례를 치렀으나 이후 아들 요시무네가 다시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독실한 [[기리시탄]]임에도 불구하고 호색한이었다고 한다. 미녀를 찾아 교토까지 갔으며 가신의 처를 빼앗는 등 여러 가지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무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져 이에 도세츠가 자주 훈계하였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무욕의 군주로 그려지는 데 이는 만년의 모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상당한 문화인으로 알려져 있다. 소린의 아내인 나다히메는 남편과 다르게 기리시탄을 싫어했다고 한다.([[http://blog.naver.com/vical77/220830952693|관련글]]) 소린의 딸들은 무장 등 명사들에게 많이 출가시켰는데 심지어 공가(公家)인 이치조 씨나 나가토 국(長門國)의 대표적 대영주 모리 씨에 출가하는 경우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